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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홍타이지

 

0.0 사실 책이 전문적인 역사 학술서적 같아서 읽을까 말까 고민했는데 재밌어보여서 읽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정말 재밌어서 끝까지 읽었다. 앞에서 교수님이 쉽게 서술하면서도 학술서의 특징을 담았다고 하셨는데 그런 것 같다. 병자호란을 접한 것은 중고등 역사 교과서에서 조선의 양난으로 외운 것이 처음이었고, 이후에는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나 같은 제목의 영화를 봤다. 이 책은 그 실상을, 전쟁 전후를 아우르며 자세히 연구한 내용이다.

 

0. 서언

책은 그동안 전쟁의 원인으로 동아시아 국제관계와 조선의 외교 실패를 주로 다룬 한국의 문헌들을 언급하고, 책의 목표가 청나라,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병자호란의 전개과정을 상세히 밝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1. 친정

병자호란은 청의 총력전이었다. 병자호란은 황제 홍타이지의 친정이었고, 명나라의 북방을 정리한 후 이루어졌으며, 청나라(후금까지) 역사상 최대의 병력이 동원된 전쟁이었다. 특히 팔기만주/팔기몽고, 우전초하(팔기한군), 천우병/천조병의 가용 병력이 약 3만 1천명인데, 이 중 2만 2천명을 동원하였다.

조선은 군사적으로 별 볼 일이 없는 나라였음에도 홍타이지는 왜 이런 전쟁을 벌였을까? 그것은 홍타이지 본인이 칭제 과정에서 조선 정복을 제일 이유로 들었지만, 조선이 이에 반대하여 대의명분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정묘호란에서 청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홍타이지는 칭제에 형제의 의견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선의 사신들은 홍타이지의 칭제 행사(병자년 4월 11일)에서 인정을 못하겠다고 버텼다. 청과의 분쟁에 대비하라는 조정의 절화교서는 청이 맹약을 깨지 않았다는 증거로서만 기능했다. '조선 정복'은 칭제 과정에서 홍타이지 자신의 업적이 되어야 했다. 미완의 병자년 황제즉위식은 홍타이지의 결자해지가 필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저자는 이런 이유로, '홍타이지의 전쟁'이 병자호란의 성격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읽으면서 '그래 너 황제 해'라고 말하고 싶었다. 자기가 무리수 두고 왜 엄한 사람들 죽이는지..민족의 비극이지만 웃긴 부분이 있어서 가져왔다.

그런데 존호를 칭하라는 요청을 수락하는 자리에서 홍타이지가 돌연 "조선국의 왕은 (나의) 형제가 되어 있다. 그에게 상담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제 사신을 보내어 이 이야기를 조선 왕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칭제'가 과대망상적 행위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던 터라, 홍타이지는 최소한 명의 최대 조공국인 조선의 인정이라도 받아야 그나마 '칭제'의 명분이 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책 67쪽~68쪽)

 

2. 기습

임금 인조는 정묘호란 때보다 일찍이 강화도로 피신을 결정했다. 그럼에도 그 길이 막히는 바람에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청군의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던 것이다. 구범진 교수님은 이를 대략적으로 공격전략의 성공과 방어전략의 실패 차원에서 분석하신다. 조선은 정묘호란을 바탕으로 북방의 산성을 쌓고 개전 시 군민이 성에 들어가 저항하며 왕이 강화도로 피신할 시간을 벌려고 하였다. 그런데 홍타이지는 "직도"를 선택했다. 로오사 선봉대는 8일 밤 압록강을 넘어 14일 한양에 도달했다. 포위에 필요한 후발 병력은 이틀 후에 도착했다. 교전은 거의 없었고, 조선은 자기 꾀에 빠진 꼴이 되었다. 당시 선봉대의 속도는 하루 90KM를 이동할 정도라고 했으니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물론, 한양에 도착한 것은 본진이 아니라 최소한의 포위병력이었으므로 정보가 더 정확했다면 중간에 맞서 싸우거나 강화도로 피신할 수도 있었겠지만, 파발을 받은 기록을 보면 조정은 본진이 이 정도 속도로 달려온 것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3. 포위

결국 홍타이지까지 남한산성 부근으로 와서 조정을 포위했다. 이 부분은 상당히 암울하다. 우선, 북방 국경과 한양 사이에 주둔하던 군대는 청군에 의해 박살나거나 거의 움직여보지도 못했다. 교수님은 이 원인을 양로병진과 시차진군 작전의 주효한 성공으로 설명하신다. 홍타이지가 속한 주력은 선발대와 본진 그리고 후발대로 나뉘어 대략 일주일의 간격을 두고 움직였다. 이 움직임만을 고려하여 용감히 근왕에 나선 김자점 장군은 예상치 못한 좌익에게 격파당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다른 장수들은 섣불리 군을 움직일 수 없었다. 본진과 좌익, 그들이 부대를 나누어 밀려들어오고 있는데 언제 어디서 청군을 만날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남쪽의 근왕 시도도 모두 실패했다. 이미 조정은 전쟁의 낌새를 느끼고 전라, 경상, 강원, 충청 등에 전쟁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었다. 영민한 장군들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근왕 명령 없이도 바로 한양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청군의 기동력과 전투력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였다. 군대가 중간지점에서 합류하여 오는 것이 아니었기에 각 도의 근왕병은 각개격파 당했다. 이것은 사르후 전투에서 청군이 조명연합을 상대로 벌인 기동전과 흡사한 양상이라고 한다. 이렇게 북쪽은 발이 묶이고 남쪽은 모두 패전하여 남한산성의 포위가 완성되었다. 

어차피 너무 암울한 상황이기 때문에 주요한 승전만 더 찾아봤다. 두 전투가 있다. 하나는 전라병사 김준룡 장군이 지휘한 광교산 전투다. 김준룡 장군은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하며 야전의 길을 걸어온 장수라고 한다. (무과 출신) 김준룡 장군은 남한산성이 잘 보이는 광교산에 진을 치고 기회를 봐서 진군하겠다는 파발을 성으로 전한다. 이에 맞서 청군에서는 홍타이지의 매부 양구리와 도도가 지휘관으로 나섰다. 김준룡은 병사들에게 평소보다 많은 탄약을 지급하고 광교산을 올라오는 계곡에 화력을 집중함으로써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양구리는 후방 기습 작전을 지휘하다가 총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 전투는 조선군의 전력으로 청군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전투인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보급을 담당한 본진이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서 병력이 와해되었다는 아픈 점도 가지고 있다. 둘째는 평안병사 유림 장군이 지휘한 감화전투다. 유림은 애당초 북방 국경지역에서 전쟁 발발 시 안주를 지키라는 명을 받았지만, 청군이 안주를 그대로 통과하는 것을 보고 뒤늦게 근왕에 나선다. 김자점의 부대가 토산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상치 못한 청군의 움직임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강원도쪽으로 우회하여 남한산성으로 가던 중 감화에서 북상하던 청군을 만나 격파하였지만, 전쟁은 곧 끝난다. 듣기로 유림 장군은 조선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이었다고 하며(애초에 전운이 도는 와중 국가의 전략적 요충지에 배치되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청군 부대에 소속하여 대장 지위로 많은 전투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왜 그런지는 더 알아봐야함) 

 

4. 조류

이 장에서 사료를 통해 역사를 어떻게 연구하는지 간접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만큼 사료가 풍부하고 과학적 사실까지 동원한 사료의 교차검증과 추론 전개가 치밀하다. 청군의 수군 전력은 조선에 비하면 없는 수준이었지만 강화도로 도하해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결론적으로 조류의 흐름덕분이고, 청군이 조선 조류의 흐름까지 정확하게 아는게 불가능해 보이기에 이는 내부 정보원의 존재가 의심되는 정황이다. 

강화도에는 봉림대군이 피신해 있었고, 수군 대장으로는 강신흔과 장신이 있었다. 사후 기록이 엇갈리기에 구범진 교수님은 해당 장소에 있는 이민구와 조익의 목격담과 인조실록, 그리고 청의 문서를 통해 사건을 재구성한다. 우리의 판옥선은 총 34척 정도였고, 상대는 수레로 끌고 다니는 작은 동동배 수준의 배를 탔다고 한다. 그런데 수군이 뚫린 이유는 조류 때문이다. 염하수로를 막으면 되는 조선 수군은 북쪽에는 강진흔의 함대가 7척, 남쪽에는 장신이 27척의 함대를 이끌고 북상 중인 상황이었다. 애초에 조선 수군은 북쪽 경로(갑곶)을 강이 얼었기 때문에 상륙지점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시(9시~11시) 가 끝나갈 무렵 북상하던 장신 함대 쪽으로 물길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강진흔의 함대는 이미 홍이포에 맞아 파괴되었던 것 같다. 그 틈을 타청군의 동동배는 빠르게  도하하고, 섬 위에서 조선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잡혀버려서 인조가 투항하는 큰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5. 반전

홍타이지의 본래 구상은 강화도로 가는 강이 녹을 때 강을 타고 섬을 점령한 후, 인조가 투항하지 않으면 공성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홍타이지의 태도는 1월 16일을 기준으로 급변한다. 그리고 강화도 공격을 서두른다. 인조가 사신을 보내도 만나주지도 않더니 갑자기 투항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과거 비슷한 국면의 전투에서 홍타이지는 이렇게 서두르지 않았다. 양측은 협상의지가 있었고, 투항하며 강화도의 종묘사직 보존을 꾀하던 인조는 강화도 함락 소식에 투항을 진지하게 고려한다. 그 결과 홍타이지는 조선의 왕과 군신관계를 맺고 빠르게 조선에서 철수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교수님은 조선의 천연두 때문으로 의심한다.

 

6. 마마

이 장에서는 청군의 빠른 철수의 동기를 천연두로 의심한다. 그리고 이태껏 홍타이지는 천연두를 피하는 '피두'의 기간을 가졌는데 병자호란만은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천연두에 대한 사료가 거의 없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천연두를 신의 뜻으로 여겼는데, 홍타이지의 조선 정벌은 의로운 싸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료 곳곳에서 생신과 숙신을 분리하여 작전을 고려한듯한 내용이 나온다. 몇몇 왕의 흔적이 단절되고, 생신으로 추정되는 외번몽고군이 먼저 철수한 것 등이 그렇다. 홍타이지 본인도 소수의 인원을 이끌고 승전 후 어떤 마을도 들리지 않으며 빠르게 철군했고, 소현세자와의 만남까지 미뤘다. 게다가 논공행상에서 영내 천연두 환자가 발생한 것을 뒤늦게 알린 자가 처벌을 받았다. 모든 사료를 고려할 때 16일의 중대사건은 영내에 천연두 환자가 발생한 사건일 것이다. 홍타이지 및 생신들은 피두에 들어가야 했다. 마마가 전쟁의 판도를 바꾼 것이다.

 

7. 대미

이 장에서 주로 다루는 질문은 홍타이지의 전후 구상이다. 조선을 복속시키고 어떻게 다스리려 했던 것인가? 지금까지의 논의의 결과로 보아 전쟁은 홍타이지의 정치적 아젠다로 인해 발발했다. 홍타이지는 천연두에 취약한 생신이었기에 조선 국왕의 빠른 동의만 얻고 돌아가려 했고, 그 과정에서 강화도를 함락시키면서 조선 국왕의 삼궤구고두를 받아냈다. 전승 이후 해당 지역을 직접 통치하거나 간접 통치하는 방법 등이 있는데, 홍타이지는 서신에서 직접 통치의 의지만 드러낼 뿐, 군신관계가 확인된 이상 조선에 더이상 간섭하고 싶지 않아 보인다. 마마의 공포 앞에서도 홍타이지가 인조의 출성을 원한 것은 이러한 연유였다. 게다가 삼궤구고두 의례에서 인조를 2인자의 자리에 앉히고 자신과 같은 선에서 예를 진행했다고 한다. 전쟁의 시작과 끝은 오로지 홍타이지였다.

 

- 부록

이 장에서는 앞서 4장에서 언급한 정보원의 존재를 추적한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것은 향화호인이며, 사료 상 남양부에서 청군으로 이반(귀순)한 여천과 마푸타가 유력해보인다. 그들은 동해여진(흑룡강쪽) 출신이어서, 강화도 도하에 쓰인 배를 만들 줄 알았으며 조종도 할 줄 안 것으로 보이고, 어업에 종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정보를 종합해볼 때, 이들이 서해의 바다 정보를 제공하고, 강화도 도하 작전의 공신이었음이 드러나는 듯 하다.

 

****후기****

이 많은 사료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고 추론해내는게 보통 일이 아님을 느꼈다. 해결할 의문을 갖는다는 것 자체도 어려워보이는데, 이 의문에 맞는 사료들을 하나씩 찾아 비교 점검하고 결론을 추론하는 것이 대단하다. 특히 교수님께서 역사학적 사고과정을 따라갈 수 있도록 서술했다고 하셨는데, 의문점과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사료들이 하나씩 등장할 때마다 신기하게도 고개가 끄덕여지며 납득됐다. 물론 내가 역사를 잘 몰라서 그럴수도 있다. 어쨌든 이치에 들어맞지 않는 추론은 없었던 것 같다. 재밌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