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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0.0 고등학생 때 사탐으로 동아시아사를 했었는데 일본사에 관심이 가서 읽게 되었다. 사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일찍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서 제국주의를 동아시아에서 실행했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가 궁금하기도 했다. 어떤 차이가 있길래 그랬는지 궁금했다. 사실 유학이 우리나라의 보수적 문화, 경직성 등의 원인이 되어서 나라가 팔린 주요 원인으로 지목당하기도 했는데, 일본은 오히려 유학이 사회변혁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1. 일본의 빠른 서양문물 수용

 책은 일본이 빠르게 서양문물을 수용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로, 18세기부터 퍼져있었던 '과도한 위기론'을 지목한다.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고, 러시아인들이 사할린과 훗카이도 지방에 출현하면서, 위기와 개혁을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그것은 소수의견이었고, 오히려 그러한 위기감을 조성한 하야시 사헤이의 책은 금서가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의 명맥은 이어졌고, 일부 동조하는 정치인들도 등장하며, '강력한 소수파'로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만 러시아 사절단은 일본에 외교를 제안하러 왔다 거절당하고 순순히 돌아갔으며, 당시 러시아의 객관적 전력은 약했으므로, 이러한 위기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해명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다섯 가지 정도를 지목한다. 첫째, 200여년 간 막부 성립 이후 군사적 위기 상황이 없었다. 둘쨰, 외국 항해술과 조선술의 발달에 비해 일본은 해군력이 전무한 것으로 인해 에도만이 봉쇄되면 수도 방어가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셋쨰, 일본은 중국 중심의 조공체제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보낸 것과 다르게 청-서양이 결속하여 침략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넷째, 빠르게 세계의 정세를 파악하며 당시를 전국시대의 7웅이 할거하는 상황으로 인식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 7웅에는 일본도 있었다) 다섯째, 어느 정도의 proto-nationalism이 발달했다. 이들은 외세의 침략도 받지 않고, 역성혁명을 통해 천황을 몰아내려는 시도도 없으니 일본인의 정신은 순결한 것이며, 이것을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는 심지어 해외웅비론까지 제시되었다. 당할까봐 벌벌 떨기보다는 차라리 먼저 밖으로 나가자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해외웅비론은 상술했듯 지리적 고독감과 서양의 제국주의 식민지의 확장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에조치가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에 러시아가 등장한 점, 해외 침략자를 영웅화하던 사회 풍조 등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소수에 불과했다. 결국 일본은 1854년과 1858년 4년 간격으로 미국과 강제 조약을 체결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주류는 쇄국수구론으로 4국통신통상론을 주장했고,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없다시피 봤지만, 아편전쟁의 발발로 이들의 인식에 커다란 전환이 생겼다. 

 그것은 적극적 개국론과 양이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적극적 개국론은 해외웅비론과 비슷하게 문호를 개방하자는 것이라 이해가 되지만 양이론은 서양 오랑캐를 배척하자는 입장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주장했던 것은 개방은 시기상조이기에 힘을 길러 우리의 뜻대로 우리가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개방을 하자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장래에 일본이 미국에 직접 가서 무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요시다 쇼인은 우선 항해능력을 키우자고 주장했다. 

 

2. 막부의 종말

 막부는 전형적인 앙시앙레짐이 아니었다. 외부의 요구와 그 요구의 수긍이라는 형태로 충돌과 유혈사태 없이 자연스레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막부는 68년 무너질 때까지 개혁개방을 추진했고 서양에 호의적이었으며 국내정치적으로 고립되어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뛰어난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리더십이 부재했다. 그는 총명했지만 출신을 둘러싼 외부의 갈등이 너무나도 많았다.

 정치권력의 구성은 우선 막부를 중심으로 최측근인 고산케번이 있다. 이것은 도쿠가와 가문의 세 아들이 세운 가문으로 막부 방어와 세자가 없을 시 대를 이을 양자를 배출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실제로 중간에 한 번, 쇼군의 아들이 없어서 고산케인 기이번의 도쿠가와 요시무에가 쇼군이 되었고, 이후 그의 세 자손들이 또 고산케와 비슷한 고산쿄를 구성하게 되었다. 고산쿄 출신인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는 50명의 아들을 낳았고, 많은 이들이 도자마번(도쿠가와와 정적인 번)까지 양자로 입양되었다. 황실의 피를 입양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 고산케 중 한 번인 미토 번은 메이지 유신까지 양자를 받지 않았고, 정통 황실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갔다. 이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바로 이 미토 번 출신이다. 막부 내에 라인이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막부를 온전히 장악할 수 없었다. 또한 미토 번은 다른 번들과도 정치적으로 소원했는데, 미토 번의 야심있는 다이묘,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존왕양이를 계속 강조했고, 쇼군의 막부를 비판했으며, 막부 감시체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3. 유학

 책에서는 메이지 유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책 읽는 사무라이, 유학에 영향을 받은 사무라이와 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학당을 지목한다. 19세기 전에도 일본에서는 간간히 유학을 받아들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적이지는 않았고, 유학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던 다이묘들이 유학자들을 가신으로 두고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평화체재가 길어지고, 칼 든 사무라이의 쓸모가 적어지며, 하급 사무라이들은 심지어 상업가들에 비해 돈도 별로 벌지 못하고 명예조차 없어졌으니 그들은 길을 잃어버렸다. 이로부터 사무라이의 사화가 시작된다. 영내에 모여살았던 사무라이들은 그들끼리 학적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막부 체재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다. 천황이 존재하는데 쇼군은 무엇인가? 왜 존재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주를 이뤘고, 이는 무시되었던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존왕양이 사상과 흐름을 같이 하여 군주 친정의 요구까지 이르게 된다. 이들은 조선과 청에서 이루어졌던 상서까지도 활발히 사용한다. 쇼군, 다이묘에게 직접적으로 정치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것이다. 이는 군대의 계급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신문까지 일본에 보급되며 그 열기는 겉잡을 수 없게 되었다.  

 

후기

일본사 자체는 통사로 공부해본 적이 없어서 초반 일본의 정치체재를 이해하는데 애를 먹었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유학의 수용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 발전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 신기했다. 우리나라가 유학때문에 일본에 먹혔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외부적 조건이 더 필요한 것 같아. 동아시아 국가의 각각 다른 유학 수용 형태도 궁금해졌고, 유학 자체의 내용도 더 궁금해졌다. 메이지 유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됐는지, 전쟁을 일으킬 깡은 어디서 나온건지도 더 알아보면 좋을 것 같다.